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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조선은 뇌물천하였다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 저자정구선
  • 출판사팬덤북스
  • 출판년2012-03-26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0)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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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관료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 왕조가 바뀌어도 뇌물 풍조는 계속되었다

    - 대신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 중앙 요직에 앉아서도 마음은 뇌물 밭에 ……

    - 노비마저도 상전에게서 배운 것은 뇌물수수였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현재 대한민국은 공직사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뇌물수수 및 공여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근래에 발생한 부산 저축은행 사태, 대통령 친인측의 청탁비리, 공무원들의 뇌물수수, 스포츠계의 승부조작 등은 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이런 뇌물수수와 청탁비리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의 부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만큼 부정한 청탁과 뇌물수수 및 뇌물제공이 공공연하게 만연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뇌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임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초기(태조~성종)에 만연했던 뇌물수수 사건들을 통해서,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에도 변함없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뇌물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지금도 청탁이나 뇌물 제공 등으로 부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들이 이 책을 읽고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책의 집필 의도가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중앙 권력자부터 노비까지 뿌리박힌 뇌물수수 관행



    우리가 집중적으로 조명할 조선 초기(태조~성종)에는 뇌물이 공공연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뇌물 풍조가 만연하였다. 위로는 중앙의 권력자들인 정승 · 판서 · 참판으로부터 아래로는 내시와 아전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받아 챙겼다. 심지어는 노비조차도 뇌물을 받았다. 또한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관찰사는 수령들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수령들은 상인이나 백성들에게서 뇌물을 거둬들였다. 문관만이 아니라 무관들도 뇌물을 받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들이 상인들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후궁이나 임금의 유모 중에도 이것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범죄자를 다스리는 포졸과 곤장을 치는 나장들까지도 뇌물을 받는 실정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최하급관리라고 할 수 있는 아전들은 선상노비選上奴婢 선정, 공물 수납, 부역 부과 등과 관련하여 뇌물을 챙겼다. 그밖에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사신들이 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많다 보니 이와 관련된 무고나 탄핵이 난무하여 깨끗한 사람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을까?



    당시에는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바쳤다. 관찰사들은 중앙의 권세가들에게 줄을 대어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 뇌물을 주었고, 수령들도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며, 자신들의 고과성적을 매기는 관찰사들에게도 뇌물을 바쳤다. 그 밖에도 죄수 · 상인 등이 뇌물을 제공했고, 특히 외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본인들과 귀순하려는 여진족이 조선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도 있었다. 사회 전반이 이렇다 보니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뇌물을 전달하는 뇌물 브로커나 소송이나 고소를 업으로 삼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그들은 왜 뇌물을 주었을까?



    우선 인사청탁을 위해서 이조 판서나 재상 등에게 뇌물을 바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요즈음처럼 군대 징집을 면제받으려고 하거나, 세금 감면, 형벌 감형, 재판 승소 등을 위해서 뇌물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뇌물을 받은 본인은 최고 사형, 중노동을 시키는 도형徒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던 장형杖刑, 작은 매로 볼기를 치는 태형笞刑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뚝에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할 수도 있었다. 뇌물을 주거나 받은 본인만이 아니라 그 자손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요직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았다. 또한 뇌물을 받은 자와 함께 뇌물을 준 자도 아울러 처벌하게 되어 있었고, 뇌물을 주거나 받은 자를 천거한 사람도 벌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뇌물과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나 중신들의 경우 불문에 부쳐지거나 경미한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처벌이 미온적이다 보니 뇌물비리가 만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선을 뒤흔든 뇌물 사건들



    - 임금이 지시한 뇌물금지 및 처벌법을 우습게 안 대신들

    세종 6년(1424) 7월에 임금은 대신이나 조정 관리 중에 뇌물을 받는 자가 많아 이를 엄하게 금지하는 법과 뇌물을 받은 자와 준 자를 처벌하는 법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영의정 유정현은 “나 같은 늙은 자가 음식물을 받는 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겠소.”라고 했으며, 대제학 변계량과 이조 판서 허조도 이에 동조하여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하필 금할 것이 있겠소.(《세종실록》권25, 6년 7월 14일 정해)”라고 말했다. 이렇듯 당시에도 대신들은 뇌물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흐릿했다.



    - 임금 세종의 조말생 뇌물 무마 사건

    장원급제자로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은 대제학 조말생. 하지만 그의 뇌물 연류는 조선 천하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병조판서를 재직할 때에는 뇌물을 받고 소송 판결을 지연했고, 토지를 받고 관등을 올려준 부당한 인사 사건 등을 저질렀다. 충신들은 그를 죽어도 그의 죄가 남을 법하다며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 세종은 그를 선왕 태종이 총애했던 인물로 공로가 있다하여 귀양을 보는 걸로 뇌물 사건을 무마했다.



    - 신숙주의 아들 신정, 뇌물 대가로 사약을 받은 사건

    세조의 공신 훈구파의 신숙주. 그의 아들 신정은 탐욕스럽기가 끝이 없었다 한다. 신숙주는 입버릇처럼 “우리 집을 패망시킬 자는 반드시 이 자식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과거시험에서도 친구 양수사의 답안을 베껴 썼다. 하지만 세조는 그가 신숙주의 아들임을 알고 합격시켰다. 결국 그는 성종 13년(1482) 4월에 뇌물을 받고 관인을 위조하여 임금을 속인 죄로 사약을 마시고 비운을 맞게 된다.



    - 후궁의 부친이 뇌물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다

    조선 초기 태종의 후궁인 숙공궁주의 아버지 김점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직접 자기 침실 안으로 드나들게 하여 뇌물을 받았으며, 벼슬을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옥사도 봐주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까지 뇌물로 석방시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를 관둘 때, 뇌물을 운반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나도 받은 뇌물은 변함없이 남아 있는 법이다. 예나지금이나 공직자는 뇌물로 퇴임 후를 준비한다.



    - 뇌물로 군역도 면제받다

    장수나 만호 등 무관들의 뇌물수수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7년(1398) 2월 경기도 관찰사 박경의 보고에 의하면,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된 무관인 만호와 천호 들이 자기가 관할하는 수군들 가운데 부유한 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정작 국경을 지킨 자들은 가난한 사람과 아이, 그리고 늙은이들뿐이었다고 한다.



    - 암행어사 출두도 미리 알려 피하게 했다

    성종 20년(1489) 11월 사간원 헌납 윤긍 등이 암행어사를 보내어 수령들을 규찰할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어사는 어느 지역에 들어가기도 전에 앞질러 소식이 전파되어 고을 수령에게 알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사가 데리고 다니는 서리(아전)들이 암행어사의 위엄을 빌어 권세를 빙자하여 고을 수령을 위협하여 뇌물을 낚아채는 대신, 암행어사의 출두 시점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요즘 경찰의 업소 단속 세태와 비슷하지 않은가!



    -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사람들

    30여 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한결같이 청렴하기만 했던 정창손.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고변한 김질의 장인으로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성종 18년(1487) 1월 향년 86세로 정창손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청빈한 재상이니 부의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명했다. 그의 시호가 충정忠貞인데, 그가 도를 곱게 지키고 굽히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성종 때 이조와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한 이숭원도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청백리였다. 그는 예조 참판 이보의 아들로서 문관에 장원급제하여, 사제감 주부에 임명되고, 바로 사간원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그후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장례원 판결사, 좌승지, 평안도 관찰사, 이조 판서 등을 거쳤지만, 집안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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